두 사람이 100만 원을 나눈다. 한쪽이 99만 원은 자신이 갖고, 상대방에게는 1만 원만 제안한다. 거절하면 둘 다 전액을 잃는다. 당신은 받아들이겠는가?


나도 그 질문을 봤다.

많은 사람이 동의한다는 걸 알지만, 나는 아니다.

이건 아무렇게나 만든 질문이 아니라, 경제학과 심리학의 고전적 실험 — “최후통첩 게임(Ultimatum Game)“이다.

1980년대에 등장했고, 인간의 행동 패턴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다.

규칙은 간단하다. 테이블 위에 돈이 있다(보통 100만 원이 아니라 100달러다).

한 사람이 분배를 제안하고,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만 있다.

받아들이면 제안대로 돈을 나눈다.

거절하면 둘 다 한 푼도 받지 못한다.

전통 이론의 예측과 실제 실험 결과는 크게 다르다.

전통 경제학의 ‘합리적 인간(호모 이코노미쿠스)’ 가정에 따르면, 양측이 충분히 이성적이기만 하면 1달러라도 0보다 낫다.

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.

그러니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언가 주기만 하면 받아들여야 한다.

분배자 입장에서도, 상대가 ’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’고 생각하니 최소한만 주면 된다.

어차피 1달러 주고 99달러를 가져가도 상대는 받을 테니,

2달러, 3달러를 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?

이것이 이성적 가정이다.

하지만 실제 실험은 다르다. 분배 비율이 20~30% 아래로 떨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거절해 버린다.

이성적이지 않다.

사람들은 그저 — 이건 불공평하다고 느낄 뿐이다.

분배자가 제시한 극도로 불공정한 조건과 모욕감 앞에서,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분배자를 처벌하려 한다.

이성적이지 않다. 하지만 지극히 옳다.

이 실험은 다양한 문화권, 다양한 금액, 다양한 집단에서 반복되었고, 결론은 거의 일관된다:

문화에 따라 거절률에 차이는 있지만, ’불공정에 대한 거부’는 여러 연구자들이 거듭 확인한 보편적 가치다.

이 실험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대응되는 장면을 찾을 수 있다:

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, 단지 출신이나 운 덕분에 분배자가 된다.

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저 받는 사람일 뿐이다.

분배자는 분배할 권한을 쥐고 있고, 그 권한 하나만으로 매번 게임에서 우위를 점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.

보통 사람들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.

분배자 곁에는 수많은 ‘이성적인’ 변호자들이 붙어 논리를 갖다 붙인다: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고, 1%라도 0보다는 낫다고.

그리고 이 받는 사람이 거절해도, ‘네가 안 하면 할 사람 널렸다’ — 다른 받는 사람이 받아들일 거라고.

결국 그들은 항상 더 많이 가져간다.

우리 노동자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?

판을 뒤엎는 것이 방법이다.

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니 — 너도 못 갖게 하는 게, 더 낫다.

그래서 자본이 지나치게 가혹한 분배 조건을 내밀 때, 많은 노동자들은 그냥 일을 멈춘다.

나는 일하지 않음으로써 작은 월급만 잃을 뿐이다. 하지만 자본가인 너희가 잃을 것은 훨씬 더 크다.

그러니 자본이 제시하는 최소 보수도, 노동자가 일을 멈추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어야만 한다.

이러한 게임은 저임금 노동 집단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. 할리우드 작가들도 항의한 적이 있다.

내 존엄이 사라졌다고 느껴질 만큼 분배 조건이 터무니없고 모욕적이라면, 판을 뒤엎을 수 있다.

이것이 노동이 가진 최후의 견제 수단이다.

원래 실험에서 분배자는 평균 63%를 가져갔고, 받는 사람은 평균 37%를 가져갔다. 약 2:1 비율이다.

통계에는 평균을 끌어내리는 극단값이 많이 포함된다. 중앙값만 보면 훨씬 균형 잡혀 거의 반반에 가깝다.

이후 여러 파생 실험도 있다:

시장 경제가 발달한 곳일수록 분배가 더 공정한 경향이 있는데, 사람들이 협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.

예를 들어 미국 등 서구에서는 분배자가 평균 45%를 내준다.

몽골에서는 분배자가 평균 10~20%만 주고, 상대도 대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.

분배자가 더 많이 주는 경우도 있다. 인도네시아 포경 부족처럼 협력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사회에서는,

분배자가 기꺼이 58%까지 내주기도 했다. 자신이 갖는 것보다 더 많이.

지역 문화가 낳은 결과다.

작은 사회 집단에서는 서로가 너무 잘 알기에, 굳이 얼굴 붉힐 이유가 없다.

하지만 어쨌든, 나는 1%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.

실험에는 변형도 있다: 분배자가 얼마를 주든, 상대는 판을 뒤엎을 수 없다.

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.

이런 속수무책의 실험에서도, 분배자는 보통 20~30%를 상대에게 준다.

그러니 1%는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이다.

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: 하지만 이건 자본과 노동의 이야기가 아니라,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것 아니냐고.

맞다. 그런데 생각해 보자. 우리는 회사 저 높은 곳에 있는 대단한 임원들이나 투자자들을 정말로 알고 있는가?

그들이야말로 바로 우리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다.

자본은 자신을 깨끗하게, 남처럼 포장하는 데 능하다.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인사 담당자, 직속 상사가 가장 더러운 일을 대신할 뿐이다.

저 멀리 있는, 서로 모르는 사람들 — 1년 내내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고, 고작 연말 시상식 영상에서나 등장하는 사람들.

하지만 그들이 가장 많은 몫을 가져간다.

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.

그리고 앞서 말했듯, 미국 실험에서는 더 많이 줘야 했다. 몽골에서는 덜 줘도 거절당하지 않았다.

단지 몽골이 부유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.

돈이 적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.

이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분배 메커니즘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말해 준다.

모든 사람이 평균적으로 여유를 갖도록.

모든 사람의 통장에 어느 정도 저축이 있고, 버틸 힘이 있을 때, 비로소 불공정한 분배 메커니즘에 ’아니요’라고 말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.

판을 뒤엎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.

개인적 차원에서도, 우리 각자는 스스로를 위한 뒷길을 준비할 수 있다.

저축을 모아 두는 것이다.

누군가 우리 앞에 1:99라는 터무니없는 분배 비율을 들이밀 때,

우리는 그제야 더 담담하게 그 말을 할 수 있을 테니까:

너도 못 갖게 하는 것, 그게 나한테는 중요하다.